통합검색

세부정보

주소 경상남도 남해군 화방사길 128-6
담당자 전화 055-863-5011
  • 이용요금 : 무료
  • 주차정보 : 화방사 주차장
화방사는 남해 제일봉인 망운산으로 곱게 난 아스팔트를 따라 오를 수 있어 진입이 매우 수월한 편이다. 남해대교에서 19번 국도를 타고 들어오다가 이어마을에서 오른쪽 길로 접어들어 다시 3km 정도 가다보면 고찰 화방사를 만날 수 있다. 조상들의 고된 삶이 그대로 묻어 나는 계단식 논이 아래로 보이는 길을 따라 옹기종기 모여 앉은 대계마을과 푸른 기운이 넘치는 강진만 풍광에 넋을 놓다 보면 어느새 풍경소리가 귀에 들린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면 약수터 곁 돌다리. 무지한 이들은 차를 탄 채 그대로 대웅전 가까이로 직행하지만 절에 오는 법도를 아는 이들은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돌다리를 건너 일주문으로 향한다. 일주문 돌계단을 오르면 겹처마 맛배지붕인 채진루와 팔작지붕 대웅전이 고개를 내밀며 채진루 맞은편에는 천연기념물인 산닥나무 자생지가 있다.

신라 신문왕 때 원효대사가 보광산(금산)에 보광사를 세우고 망운산 남쪽에 연죽사를 건립한 것이 화방사 역사의 시작이다. 고려시대인 1200년대에 진각국사(眞覺國師) 혜심(慧諶)이 연죽사를 현 위치의 서남쪽 400m에 옮기고 영장사(靈藏寺)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이름을 바꾼 이유는 이렇다. 진각국사는 멀리 신령스러운 기운이 바다에 감추어져 있는 것을 보았다. 바로 떼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서 산을 바라보니 호산(湖山)의 좋은 형상인 망운산이 나타났다. 그는 말했다. "영구(靈區)가 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냐" 그 뒤 절 이름을 영장이라 하고 승도를 거처하도록 했다.

영장사는 임진왜란 때 불에 타 소실되었는 데 인조 15년(1637), 서산대사의 제자인 계원(戒元)과 영철(靈哲) 두 선사가 지금 위치에 이건 중수(移建重修)하고 '연화형국'의 뜻을 취해 화방사라고 했다.

화방사 역시 103년이 지난 1740년에 화재를 입었다. 사방이 일시에 재가 되고 승도들이 흩어졌으나 다음해인 영조17년(1741)에 석순, 충찰, 충념 등이 동지들을 모아 재건했다. 기풍 당당한 대웅전 뜨락 오른쪽으로는 대밭을 배경으로 사색에 잠긴 부처상과 범종루가 있다. 왼쪽으로는 이승과 저승을 이은 듯 1998년에 축조한 9층 석탑이 서 있다. 화방사 여행의 백미는 명월당에서 맞는 달맞이라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솔바람 소리도 잦아드는 밤 초승달은 서럽게, 득도에 이른 보름달은 경이로 다가와 화방사 뜨락에 내려 앉는다.

범종루에는 반야범종과 함께 법고 운판 목어 등 사물이 좌우에 있는데, 사물을 모두 갖춘 곳이 드문데다 사물의 청아한 소리가 아침 저녁의 예불시간에 산사의 적막한 기운을 쫓아내고 있어 예사롭지가 않다. 범종루 옆 대밭 앞에는 작은 석불이 지키고 있으며, 속세와 성전을 구분짓기라도 하듯 돌담이 사찰을 둘러싸고 있다. 예전에 선방이 자리했을 법한 대숲 빈터가 사찰 건물과 어우러져 경내를 더욱 엄숙하고 운치있게 한다.

채진루는 대웅전 앞마당으로 출입토록 대웅전과 마주보게 배치되어 있다. 마당에서 출입이 쉽도록 누각바닥이 마당과 같은 높이로 만든 이 누각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오량(五樑)구조로된 2층 맞배지붕집이다. 세부장식이 조선말기 수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채진루에는 화방사 효천 주지스님이 1997년 해를 꼬박 넘기는 원력불사로 복원한 "이 충무공 충렬묘비" 목판비문이 서 있다. 이 목판비는 높이 3m, 폭1.6m로 나무판 앞 뒤에 충무공의 충절을 기리는 내용으로 1300여자가 새겨져 있고 남해 충렬사에 입석되어 있는 비와 똑같은 크기와 내용이다. 당시에 탁본해 두었던 것을 새로 복원하였다.

대웅전의 본래 명칭은 보광전이었으나 보광전이 1981년 10월 1일에 화재로 소실되자 1984년 12월 29일에 신축 복원하고 대웅전이라고 하였다. 대웅전을 중심에 두고 좌우에, 특히 조선조에 많이 유행하였던 부불전(副佛殿)인 명부전과 응진전을 배치한, 이른바 3불 전형(三佛殿型)배치를 보이고 있다.

불전의 수에 따라 보통 대웅전을 중심으로 좌우 모두 예배용(禮拜用)전각으로 구성된 것을 3불전형이라 한다. 화방사의 3불전형은 특이한 사례로 양산의 장안사에서도 찾을 수 있다.

화방사의 삼불전형은 초기 사찰의 가람 구성 형식을 유추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초기의 사찰은 탑원, 금당원, 승원 세 영역이 뚜렷이 구분된다. 고려때까지도 금당원 안에는 순수한 예배용 전각들만 배치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가운데 탑원과 금당원이 통합돼 당탑제(堂搭制)가 성립하며, 이 금당원 영역이 후대의 중심불단 영역(中心佛壇領域)이 된다고 볼 수 있다.

화방사는 초기 금당원의 순수성을 간직한 것이다. 따라서 별도의 승방(僧房)구역, 즉 승원(僧院)을 구성하게 된다. 화방사의 또다른 특징은 대웅전 앞마당에 최근에 세운 것으로 보이는 탑에서 남해 한려수도의 장관을 감상할 수 있다는 점이다. 섬에 위치한 사찰만이 누릴 수 있는 공간의 장점을 최대한 살렸다.

화방사는 호국사찰로써 남해 역사의 산실로도 유명하다. 오랫동안 이순신 장군의 제사를 올렸다는 기록이 남아 있으며, 효천 주지스님이 번역하고 있는 '중건중수기' 5편은 번역이 끝나면 사찰과 남해의 역사를 재조명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 밖에도 '현판기문' 6편, '완문절목' 13편, '선생안' 7편을 비롯한 고문서가 남아 있다.

화방사에는 옥종자에 얽힌 이야기도 전해 온다. 옥종자는 사찰이 건립되어 불상을 봉안할 때 불을 밝히는 옥돌로 만든 등잔으로 한번 불을 붙이면 깨뜨려서는 안되고, 어떠한 이유에서든지 불이 꺼지면 다시 불을 붙여서는 안된다고 한다. 이 옥종자는1234년 이전에 만들어져 점화된 뒤 임진왜란 때 꺼진 것으로 알려져 현재 사용하지 않고 있다.

주변정보

관광지 지도

관광지

  • 자료 조회 중

숙박

  • 자료 조회 중

음식

  • 자료 조회 중